사주 ? - 주는 것이 편한가
주는 사람은 빚이 없다는,
주는 사람은 아쉬울 것도 꿀릴 것도(?) 없다는
엄마의 말을 가슴에 담고 열아홉에 집을 떠난 나는
여자친구를 만나던, 남자친구를 만나던
돈을 써야하는 순간이 오면 그냥 내가 내고 말았다.
특히 더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내가 계산했다. “다음에 네가 사.” 라는 말을
듣고싶지 않았고, 들을 이유도 없었다.
‘얻어먹었으니 상대에게 신경쓰고 잘해줘야한다.’ 혹은 ‘호감을 표해야한다.’ 는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내가 돈을 이만큼이나 썼는데-’ 라는 남자들의
대가를 취하려는-혹은 본전을 뽑으려는-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돈이 엄청 많거나 넉넉한 건 절대 아니었다. 은근한 관계적 압력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이쪽에서 여지를 주지 않으니 나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에게 굳이 밥 한번먹자, 커피한잔하자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걸.
나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정말 소수이고,
이런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적다는 것을.
나는 외로웠다.
그리고 혼자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자유였으니까.
누군가를 내가 느끼고 싶은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할 수 있는.
보이는 대로 보는 자유.
‘넌 왜 그런 애를 만나니.’ 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눈엔 괜찮은 사람인데. 왜 그런 말을 할까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지금은 알겠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이 나에게 ‘돈’을 많이 써서 좋아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게다가 외모 역시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까지 더해지니. 잴 거 다 재고 나서야 만남에 뛰어드는 사람에게는
내 모습이 천둥벌거숭이가 뭣도 모르고 나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누군가는 깔보는 마음으로 그런 나를 지켜봤을 것이다. 얼마나 내가 이상해보였을까.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이해할 것도 같다. 자잘한 빚을 주고 받는 게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고
거기서부터 ‘아는 사람’이라는 게 생긴다는 것.
친구가 중요하지만, 아는 사람도 중요하다는 것.
일부러 빚도 져가며 내 일부를 보여주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라는 걸.
그리고
받아야 더 많이 돌려줄 수 있다는 것도.